(전주=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1억원을 줘도 안 판다니께. 부채가 아니고는 다른 아무 것도 내 마음이 허락하지 못하는겨"
일흔을 훌쩍 넘긴 반백의 노인은 순간 20대 청년으로 돌아가 눈빛을 빛냈다. 마디가 굽어버린 손가락으로 부채를 부여잡더니 한참 동안 놓을 줄을 몰랐다.
400년 전통의 전주 합죽선(合竹扇)을 60년째 만들고 있는 이기동(李基東ㆍ76) 옹.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 하순의 어느 날 전북 전주시 대성동 '영진공예사'에서 그를 만났다.
살림집 일부를 개조한 7평 남짓의 단칸방이 이 '합죽선 대가'의 작업장이다. 부채 20여 점이 넣어져 있는 진열대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였고, 바닥에는 나무 도마와 대나무로 깎은 부챗살이 흩어져 있다.
이 곳이 국내에서 전통 합죽선을 만드는 유일한 공간. 흰 러닝셔츠 차림으로 주섬주섬 부채를 펼쳐보이는 왜소한 70대 노인이 이제 마지막 남은 합죽선 기능보유자이다.
전남 장성이 고향인 이 옹은 열일곱 나이에 전주로 옮겨와 부채를 처음 만졌다. 당시 근방에서 가장 솜씨가 좋았다는 배귀남씨에게서 기술을 물려받았다.
"기술 배우는 동안 다섯 번을 뛰쳐 나갔어. 대나무 밭 댕기기도 힘들고 하루 종일 앉아 있자니 무릎도 에리고. 근디 여섯번째 들어 앉으니 탁 '이게 내 일인가' 싶더라고"
합죽선을 내다 팔아도 벌이는 8남매를 낳아 키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내는 "부채 내다버리고 리어카라도 끌자"고 매일 성화였다.
공방 규모를 키우려고 문하생을 데려와도 "힘들고 가난한 일"이라며 모두 발길을 돌렸다. 전수자로는 사위와 아들을 포함해 셋만 겨우 남겼다.
기운이 떨어지고 눈도 침침해지면서 한창 때는 1년에 6천800점씩 만들던 것이 요즘은 1천500개로 줄었다. 1993년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합죽선 선자장(扇子匠)으로 지정됐지만 지원금은 한달에 70만-80만원이 고작이다.
60년 동안 부채만 잡아온 노인의 왼손 검지 손가락은 안쪽으로 휘어진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데도 이 옹은 "합죽선은 합죽선의 길을 걷는 거니께. 나는 잠깐 그 길을 이어주다 돌아갈 뿐인겨"라며 자신의 `외길 인생'을 애써 낮췄다.
합죽선은 고려시대 말인 800여 년 전 대나무 주산지인 전남 담양에서 처음 나왔다. 전주에는 단오 때마다 부채를 진상품으로 올리는 선자청(扇子廳)이 들어서 400여년 전부터 전국에서 부채장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죽선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를 도려내 '장시'와 '내시'로 불리는 부챗살 38조각을 준비해아 한다. 벌레가 쓸지 않은 질 좋은 대나무를 쓰기 위해 부채장이들은 한해 동안 늦가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만 일한다.
민어(民魚)의 부레를 끓여 쑨 풀로 대살을 겹쳐 붙인다. '합죽(合竹)'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갈퀴 모양으로 짠 부챗살에는 인두로 박쥐 무늬를 꼼꼼하게 그려 넣는다. 밤에 몰래 만나는 남녀가 얼굴을 가릴 때 합죽선을 사용했다는 유래에서 박쥐가 들어간다고 한다.
질긴 한지에 사군자 등을 그려 넣어 대살에 붙이면 태극선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부채 합죽선이 나온다. 한자루를 만드는 데 100여 일이 걸리고 손길도 수백 번 가야 한다.
접어 놓은 모양이 허리 잘록하고 엉덩이 둥근 여체를 닮았다. 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외에 얼굴 가리개, 햇볕 차단 등으로 옛부터 서민, 양반 할 것 없이 고루 애용했다.
합죽선은 선풍기와 에어컨 등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추다 이제는 선물용이나 장식용으로만 쓰인다. 1997년 두번째 합죽선 선자장으로 지정된 고(故) 엄주원(嚴柱元) 옹이 2004년 숨을 거둬 현재는 이 옹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이수자를 정해 기술을 물려줘야 하지만 벌이가 되지 않고 정부 지원금도 한 달에 고작 10만원에 불과해 나서는 사람이 없다. 세번째 제자이자 둘째 아들인 신립(47)씨는 "밥먹고 살 정도는 된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이 옹의 합죽선 외고집은 지칠 줄을 몰라 이달 25일에는 사비를 들여 전주 한옥마을 공예품 전시관에서 생전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단체전은 해마다 자주 하니께. 개인전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제.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거시기는 좀 보여주고 싶어"
1주일 동안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부챗살에 자개를 새겨넣은 '나전 칠기선', 옥조각을 새긴 '황칠 옥조각선' 등 200여 점이 출품됐다.
조심스레 '값이 얼마나 나가냐'고 묻자 이 옹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1억원을 줘도 안팔제. 팔려고 만든 부채가 아니여. 내 품을 떠나면 그대로 사라지게 되는겨"라는 옹골찬 대답이 돌아온다.
곁에 있던 신립 씨도 "수천만원을 줘도 안 팔겠다고 하시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른 데 말고 박물관에 보내야죠"라며 이 옹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죽기 전에 부채 두고 갈 전시관이나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이 옹을 뒤로 하고 '영진공예사'를 나섰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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