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를 유인하여 창 밖에 거미줄을 치게 만든다. 뚫어져도 재생된다.
개는 하루종일 꼬리를 흔들어댄다. 하루에 몇 바퀴나 돌리는지 모르겠지만 그 운동방향이 그런대로 일정한 편이니 발전기를 달아서 제 밥벌이라도 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다음은 몇 가지 고려할 문제들이다.
1. 우선 개마다 꼬리를 돌려대는 형태가 다를 것이니, 회전 운동인지 직선 왕복 운동인지에 따라 발전기 형태가 약간 달라질 것이다.
2. 개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개 주변에 개가 좋아하는 생물을 둬야 한다.
예) 주인, 이성인 개(취향이 독특한 녀석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옆집 아저씨 등
3. 개 옆에 개가 싫어하는 사람을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반갑지 않은 놈에게는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예) 보신탕집 주인, 옆집 아저씨, 옆집 고양이(스누피가 싫어하는 동물), 그 밖에 개가 싫어하는 인상을 가진 자 등
4. 개가 무서워하는 생물이 접근하게 해서도 안 된다. 무서우면 꼬리를 내린다.
예) 호랑이, 사자, 곰, 표범, 코끼리, 기린, 코뿔소, 타조, 하마, 물소, 들소, 적토마, 고릴라, 비단뱀, 독수리, 상어, 참치, 천산갑, 개장수, 용 등
5. 동물 학대 얘기 안 나오게 잘 먹여야 한다. 잘 먹어야 꼬리도 잘 흔든다.
개꼬리의 운동 에너지를 버리지 말고 아껴 써서 에너지 절약에 이바지해야 한다. 소꼬리 발전기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여태까지 본 음악회 중 두번째 또는 세번째로 감동적이었다.
여든이 다 된 노구로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서서 연주하는 체력 또한 경탄할 만 하였다.
최근 들어 샤프펜의 뚜껑이 헐거워졌다. 어쩌면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지주머니에 넣고 나갈 때 뚜껑만 동전주머니 속에 따로 넣어두었다.
그런데.
샤프를 잃어버렸다.
뚜껑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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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의 군사보다 두려운것은 유세객의 세치 혀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생존논리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이때 군주에게 나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여 나라의 정책으로 삼아 일신의 출세를 꿈꾸던 사람들이 세상에 출현하니 이들이 바로 유세객들이었다. 물론 공자도 넓은 의미에서는 유세객의 한 사람이었다.
다만 공자는 개인의 출세보다는 주(周)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질서를 바로잡고 천하를 예(禮)로써 다스리는 요순시대를 꿈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공자의 제자는 모두 3천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72명은 지금도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현인(賢人)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중에서 덕행(德行)을 따진다면 안휘(顔回)가 으뜸이고, 정사(政事)를 논한다면 계로(季路)가 수위이고, 문학(文學)을 말한다면 자유(子游)를 최고로 친다. 그렇지만 언변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이 글의 주인공인 자공(子貢)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자공의 열전을 기록하면서 “입담이 세고 언사가 교묘하다(利言巧 辭)”는 네 글자로 그를 평하였다.
자공의 언변에 대해서는 공자도 자주 이야기하며 안회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공자가 자공을 불러 말했다.
“너와 안회를 비교하면 어떻느냐?”
“제자가 어찌 안회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다만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자공의 대답에는 겸손의 태도가 나타나 있으나 사실은 안회가 총명하다면 자신도 결코 바보가 아니라는 말투도 섞여 있는 셈이다. 공자의 속 뜻은 안회와 비교시켜 자공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누그러 뜨리려고 하였던 것이지만 결코 자공의 기세는 꺾지 못하였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여러 나라의 제후에게 펼치기 위해 많은 제자를 활용했지만 자공에게는 아직까지 임무를 주지 않았다. 이 점이 자공에게는 불만이었만 그것은 공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한 것이었고, 자공에게 필요한 시기가 아직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공은 매우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남에게 묻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생각을 정리하면 매우 민첩하게 핵심을 끄집어 내어 동도(同徒)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어느날 자공은 공자에게 어느 정도 학문을 배웠다고 여기고 스승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는 거침없이 공자에게 자신에 대한 인물평을 물었다.
“선생님, 이 자공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는 자공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하였다.
“너는 크게 쓰일 수 있는 인재이다.”
“어떤 수준의 인재입니까?”
“사직(社稷)을 지켜낼 인재이다.”
공자의 말에 자공은 매우 기뻤다.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고 있는터에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찬사에 가까운 칭찬을 들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하지만 자공은 스승이 어째서 자신을 가리켜 사직을 지켜낼 인재라고 평가하고 있는지 그 기준과 속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공자의 이러한 평가는 자공의 앞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자공은 일찌기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물은적이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까?”
“양식을 늘리고, 군비를 확충하며,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아야 한다.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자공이 계속해서 공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일 부득이해서 세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것을 버려야 합니까?”
“군비를 버려야한다.”
공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두 개 중에서 또 다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양식을 버려야한다. 양식이 없다고 해서 모두가 죽는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양식과 군비는 물론이고 나라마저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공은 이렇게 공자에게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가슴 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훗날 그가 다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를 할때 공자의 한마디 한마디 말은 유세의 주요한 무기가 되었다.
어느날 자공이 공자에게 선비(士)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해야 가장 훌륭한 선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행위에 반드시 도덕의 규범이 있어야 하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해야 비로서 선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동족친척이 그를 일컬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거나, 이웃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어른을 아낌없이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다면 훌륭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말에 계산이 있고, 행동에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는 비록 시시비비와 흑백을 불문하고 자신의 언행을 관철하는 소인이지만, 역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즈음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릇이 작은 사람들이라 가히 들먹일 가치조차 없다.”
자공은 이와같은 질문을 통해 그의 목적에 합당한 표준을 만들어 갔으며, 끊임없이 자기의 행위규범을 닦아 나갔다.
자공은 언변이 뛰어나고 막힘이 없어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공자보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노(魯)나라의 대부인 숙손무숙(叔孫武叔)이라는 사람이 조정의 대신들에게 자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공은 그의 스승인 공자보다 더욱 뛰어나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자공에게 전하자, 자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집의 담을 놓고 비유하자면 나의 담은 겨우 어깨의 높이에 불과하여 어느 누구라도 쉽게 고개만 쳐들면 집안에 있는 좋은 물건을 구경할 수가 있소. 그러나 스승님의 담은 너무나 높아서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곳을 알 수가 없소이다. 지금까지 대문으로 들어온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오. 그러하니 무숙 그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것도 따지고보면 무리는 아니지요.”
자공은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관철하면서도 무숙의 입장을 어느정도 고려하는 교묘함도 보였다.
무숙은 자기의 판단을 철저하게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공을 만난 자리에서 지난번에 자신이 내벹은 언동을 떠올리면서 공자를 헐뜯는 말을 하였다. 자공은 무숙에게 화를 벌컥 내며 입을 열었다.
“무숙, 당신은 바보같은 소리를 그만하시오. 스승님은 결코 당신이 비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다른 사람의 지혜와 인품이 태산이라면 스승님은 하늘의 태양과 같소. 태산은 누구라도 오를 수 있지만 태양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소. 어떤 사람은 태양을 비방하지만, 그 태양이 한번도 빛을 거둔적이 있소? 비방하는 사람은 자신의 수양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보오?”
자공의 이러한 태도를 전해들은 진자리(陳子離)라는 친구가 어느날 자공을 찾아와 따져 물었다.
“자네는 스승에 대해서 겸양을 지키면 그뿐일세. 설마 자네는 정말로 스승이 자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나?”
“고귀한 인물은 한마디 말로 자신의 지혜를 표현하고, 또는 한마디 말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따라서 말을 할때는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 하네. 우리는 결코 스승을 뛰어 넘을 수가 없어. 예를 들어 푸른 하늘은 계단을 밟아가며 오를 수가 없는 이치와 같아. 만일 스승이 나라를 얻어 제후가 된다면, 혹은 읍(邑)을 받아 경대부(卿大夫)가 된다면 백성들이 다투어 모여들걸세. 사람들은 모두 평안을 얻고 열심히 일을 하며 함께 노력하여 천하는 크게 다스려질 것이라네. 그러하니 우리는 스승의 현덕(賢德)을 결코 넘을 수가 없다네.”
자공은 스승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으나,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주저함이 없었다. 공자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공에게 자주 훈계를 하였다.
“자공아, 너는 남을 비평하는게 그렇게도 좋단 말이냐? 내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있지 않구나.”
자공은 남을 비평하는 일을 가지고 공자에게 꾸지람을 자주 들었지만 그의 비평은 상당히 객관적인 측면도 많았다.
사람들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폭군이라고 혹평을 하자 자공은 오히려 반대의 의견을 내었다.
“은나라의 주왕이 비록 폭정을 하였지만, 전해오는 얘기처럼 그렇게 무지막지한 군주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예를들어 군자(君子)는 소인배와 같은 생활을 매우 비난하지만, 일단 자신이 소인배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시오. 모든건 당시의 현실을 보고 비난해야지 이미 승자가 된 사람들의 평가는 믿을 바가 못되오.”
공자는 유독히 자공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그것은 언변이 뛰어난 자공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경거망동이나 오판을 경계삼도록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말이 많은건 좋은게 아니다. 중요한 열쇠는 행동에 있다.”
“그렇다면 군자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말을 하기 전에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그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을 할 때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공의 주관(主觀)을 높이 샀다. 어느날 공자는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안회와 차분하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자공을 비교하며 중얼거렸다.
“안회의 학문과 도덕은 비록 뛰어나지만, 돈버는 재주가 없어 곤궁(困窮)하기 이를데 없고, 자공은 좌충우돌 하지만 돈버는 재주가 많고 매사에 하는 일이 잘되니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공자는 이처럼 자공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노애공(魯哀公;서기전 494-476년)시기에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는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공을 들먹이며 물었다.
“자공에게 정치를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공자는 거리낌없이 공바로 대답을 했다.
“자공은 담대하고 활달하며 판단이 기민하여 정치를 논하는데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소?”
자공은 언변과 요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또한 엄밀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졌다. 사실은 이것이 자공의 가장 큰 장점이며 재산이었다. 그는 재치와 해학으로 사형 사제나 동문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였지만 어떤 때는 치밀한 논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느날 자공이 염유(염有)와 함께 위(衛)나라의 군왕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그때 위령공(衛靈公;서기전 534-493년)은 괴외(괴외)를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위령공의 부인인 남자(南子)에게 죄를 짓고 어쩔 수 없이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얼마후 위령공이 세상을 떠나자 국인(國人)들이 위령공의 손자인 첩(輒)을 맞이하여 위출공(衛出公;서기전 492-481년)으로 추대하였다.
진(晉)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괴외를 위나라로 돌려보내 첩과 왕권을 놓고 다투도록 하였다. 조간자는 괴외를 왕으로 추대하여 위나라를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뜻밖에 위출공이 불응하고 군대를 보내자 진(晉)나라의 병사들은 괴외와 함께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유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공에게 의견을 구했다.
“자공, 스승님은 위출공의 위인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내가 스승님께 물어보고 오지.”
자공은 공자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엉뚱한 얘기를 물었다.
“선생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은 고대의 현인이지.”
“두 사람은 서로 고죽국(孤竹國)의 임금자리를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평생을 지냈다고 하던데 그들은 후회를 했을까요?”
“그들은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을 추구한 사람으로, 그것을 얻었는데 무엇을 후회했겠는가?”
자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와 염유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위출공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계시네.”
염유와 동문들은 자공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문을 걸었다. 그러나 자공은 당당하게 공자의 생각을 정리했다.
“괴외와 첩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네. 그런데 서로 임금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지. 하지만 백이와 숙제는 형제이면서 서로 자리를 양보했다네. 두가지 사례를 놓고 비교한다면 인의와 도덕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따라서 선생님께 위출공의 위인됨에 대해서 묻지 않아도 결론이 나오는 것일세.”
자공은 백이와 숙제의 예를 들어서 공자의 생각을 끄집어 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심리를 캐는 유세객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건의 예라고 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고 경험이 쌓일수록 자공의 언변과 기지(機智)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이때 자공은 역사의 무대로 나아가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스승이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어떻게 여길지 몰라 불안하였다. 그는 공자의 속마음을 캐보고자 하였다.
“선생님, 한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제가 아름다운 구슬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궤짝에 감추어 두는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상인에게 좋은 값으로 팔아야 좋겠습니까?”
“당연히 팔아야지. 나도 너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렸다.”
공자는 혼쾌히 자공의 게획을 허가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자공은 더욱 적극적으로 각국의 형세와 인물을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에 공교롭게도 역사의 변화는 자공에게 기회를 부여하였다.
춘추시기는 각국의 제후들이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던 시대였다. 겉으로는 주(周)나라에 천자(天子)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패자(覇者)가 최고의 권력자였다. 비록 패자는 주나라 천자의 명령을 들었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환공(齊桓公)이 처음으로 패자를 선언한 이래 진문공(晉文公), 초장왕(楚庄王), 오왕합려(吳王闔閭)가 뒤를 이어 패자가 되었다.
서기전 5세기에 이르러 주(周)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고 또한 제후의 세력에도 적지 않은 분열과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들어 대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제후의 세력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하였다. 특히 농경지가 풍부한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에서는 유력한 가문의 귀족들의 왕권을 위협하였다.
자공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격변의 전환기에 드디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였다.
공자는 제자들과 격의없이 천하대사(天下大事)와 예의도덕(禮儀道德)을 논하였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제자들의 말을 우선 듣고, 나중에 하나씩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도(道)를 가르쳤다.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둘러쌓여 그들의 견해를 먼저 들었다.
“지금 주왕실은 쇠약하고, 천하의 제후들은 패자가 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들이 나아가 각자의 재주를 펼쳐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패기만만한 자공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주왕실이 쇠약한 것은 힘있는 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주 천자의 밑에서 장군이 된다면 천하의 제후들을 천자의 발밑에 굴복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자로(子路)가 호기당당하게 군대를 들먹이자 공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로는 지나치게 교만하고 과격한게 탈이야.”
일찌기 계강자가 공자에게 자로의 인품에 대해서 물은적이 있었다.
“자로에게 인덕(仁德)이 있습니까?”
“자로에게는 인덕을 논하지 않는게 좋소. 다만 그에게 일천 대의 전차를 내주고 장군을 시킨다면 아주 적합한 인물이오. 자로는 남을 비방하지 않는 성품이라, 가히 가려다 쓸 수가 있을 것이오.”
공자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자장(子張)이 입을 열었다.
“주왕실이 쇠약해진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제(齊)나라의 위협을 막느냐는 점입니다.”
공자는 자장의 말에 상당히 놀랐다. 자장의 견해는 공자의 우려와 딱맞아 떨여졌다. 공자는 제나라의 전씨(田氏) 세력을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조만간 전씨들이 제나라의 제후자리를 넘볼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다.
“자장의 견해처럼 그것이 내가 걱정하는 바이다. 제나라는 노나라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다.”
공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공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제나라에는 비록 전(田)씨, 포(鮑)씨, 국(國)씨, 고(高)씨, 안(晏)씨가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지만 실제로 가장 큰 세력은 전씨의 전상(田常)입니다. 그들은 조부때부터 대두(大斗)로 양곡을 빌려주고, 그것을 받을때는 소두(小斗)로 하면서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습니다. 이미 제나라의 백성들은 전씨세력의 은공을 뼛속까지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씨의 가장 큰 무기이자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나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이미 불안의 씨앗은 뿌려졌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재앙으로 퍼진다면 우리 노나라도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공자는 자공의 견해에 매우 감탄을 하였다. 자로는 겨우 세상에 나가 무용을 자랑하고 싶은 수준이었지만 이미 자공은 천하의 대세를 놓고 판단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공이 매우 잘 보았다. 네가 바로 장래의 일을 꿰뚫는구나.”
이때 밖에서 제자 한 명이 급히 들어와 숨가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나라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포씨, 국씨, 고씨, 안씨의 세력에게 압박을 가해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군대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전씨는 이들 세력의 힘을 노나라와의 전쟁에 소모시키고 자신들이 제나라의 왕실을 차지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습니다.”
공자는 제자의 말을 듣고 길게 탄식을 하였다.
“제나라가 우리 노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수 년동안 노나라는 강대국의 틈에 끼어 지위가 매우 위태로웠던게 사실이다. 진(晉)나라는 6경(六卿)이 전권을 쥐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주변의 제후들을 공격하고, 초(楚)나라는 병마를 조련하며 틈틈히 중원을 노리고 있다. 또한 이웃하고 있는 제(齊)나라는 옛날의 영광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우리 노나라가 초나라에 의지하면 진(晉)이 가만두지 않으려 하고, 진에 의지하면 초나라가 공격하려고 덤벼들고, 제나라를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그들에게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형편에 놓여 있다. 노나라는 이처럼 강대한 세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이 어려운 상활을 빠져나갈 수가 있겠느냐?”
공자가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자 각자 앞다투어 방법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즉시 임금을 뵙고 군대를 정비하여 제나라와 우열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먼저 입을 연 제자는 자로였다.
“노나라는 결코 제나라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전쟁을 한다면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제나라의 출병을 제지하는게 상책(上策)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손룡(公孫龍)의 계책은 자로와는 전혀 달랐다.
“제자의 견해도 같습니다.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 전상(田常)을 설득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자장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제자들의 견해를 들으면서 점점 마음에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공자는 제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이 되자 헛기침을 하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魯)나라는 나에게 부모의 나라이고, 조상의 묘소와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고향이다. 지금 나라의 위기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걱정이 태산같다. 제나라는 세력이 강해서 노나라의 힘으로는 결코 대적할 수가 없다. 설사 막아낸다고 해도 노나라는 손해가 막심하여 재기할 수가 없다. 다른 제후의 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집안의 우물이 말라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것과 같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은 제나라에 가서 전상을 설득하여 전쟁을 막는게 상책이다. 너희들 중에서 누가 나서서 이번 유세의 중책을 맡을 수 있겠느냐?”
“제가 가겠습니다.”
성격이 급한 자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필요한 능력은 지혜이지 용기가 아니다.”
“선생님, 그럼 저를 보내 시험해 보십시오.”
공자는 공손룡의 청에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전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신중한 성격의 자장이 말했다. 공자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자공이 입을 열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자는 일찌기 제나라에 가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의 여러 귀족들 사이에 얽힌 경쟁관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선생님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자공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가거라.”
“그럼 제게 어떤 분부라도......”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임기응변의 유세일 뿐이다. 제나라의 공격을 멈추게만 한다면 그것으로 네 임무는 끝이다.”
공자는 자공에게 어떠한 요구나 분부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공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자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자공을 아껴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공의 일행은 노나라의 도성인 곡부(曲阜)를 출발하여 며칠만에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臨淄)에 도착했다. 자공은 곧바로 상부(相府;재상의 저택)로 직행하여 전상을 만났다. 간단한 인사와 몇마디 의례적인 말이 끝나자 전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어 오시었소?”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는 군대를 일으켜 노나라를 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매우 중대한 실책을 범하는 짓이오.”
전상은 자공의 직설적인 말에 약간은 당황한 눈빛을 보이면서 물었다.
“선생은 위(衛)나라의 사람인제, 내가 노나라를 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혹시 스승을 대신하여 나에게 유세를 하러 오신거요?”
자공은 결코 허세나 위협을 갖고서는 전상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거짓없이 솔직하게 노나라의 상황을 설명하며 유세하기 시작했다.
“노나라는 전쟁을 벌일만한 상대가 못되오. 그 곳은 성채가 굳건하지도 높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토지도 적고 비옥하지 못하오. 또한 군주는 무능하고 신하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소. 백성들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극도로 전쟁을 혐오하고 있소. 이런 이유로 노나라는 결코 제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소. 제가 보기에는 오(吳)나라를 치느니보다 못하오. 오나라는 성채가 높고 튼튼하며 토지가 넓고 비옥하오. 병사들의 투지도 높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었으며 신하와 병사들이 모두 나라와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소. 따라서 제나라의 상대는 오나라가 제격이오.”
자공의 말은 전상의 자존심을 긁기에 충분했다. 큰 나라가 힘도 없는 소국을 치는 짓은 소인배와 다를바 없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선생의 말은 무슨 뜻이오? 이 전상을 바보로 아는거요? 전쟁은 상대하기 쉬운 대상을 선택하는 것도 모른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이오?”
자공은 전상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상은 이미 자공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대가 노나라를 치려는 목적은 고씨, 안씨, 포씨, 국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노나라를 치면 그 목적을 이룰 수가 없소.”
자공은 전상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바에 의하면 ‘걱정이 국내에 있으면 마땅히 강대한 적을 치고, 걱정이 국외에 있으면 약한 적을 치라’는 말이 있소. 지금 그대의 걱정은 국내에 있지 국외에 있는건 아니지 않소? 제 말이 틀렸소?”
전상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노나라에 있을 때 일찌기 남들이 하는 말을 들은적이 있소. 귀국의 임금은 그대에게 세차례나 왕위를 넘겨주려고 헸지만 대신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소. 만일 그대가 노나라를 쳐서 공을 이루면 모든게 뜻대로 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소. 만일 실패하면 그 책임은 그대가 지게 될 것이며. 성공한다고 해도 그 공은 귀국의 임금과 다른 귀족이 차지하게 되오. 제나라의 영토가 늘어나면 귀국의 임금으로 하여금 자신감만 키워주는 꼴이 될 것이며, 노나라를 치는데 공을 세운 고씨, 안씨, 포씨, 국씨의 세력은 임금의 신임을 더욱 받아, 그대의 목적은 점점 멀어질 것이오. 따라서 그대가 지금 꾸미는 전쟁은 오히려 임금의 자신감과 그대의 상대인 귀족세력을 도와주는 꼴이나 마찬가지요.”
전상은 자신의 생각을 간파한 자공의 말에 점점 끌려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제가 조금전에 말씀 드렸듯이 오나라를 치느니만 못하오. 오나라는 매우 강한 나라요. 성채도 튼튼하고 양식도 풍부하며 군사들의 사기도 매우 높소. 따라서 제나라는 오나라에 쉽게 승리를 얻을 수가 없소. 따라서 오나라와 전쟁을 일으키고 그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 전쟁에 보내기만 하면 되오. 그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거나 살아난다고 해도 세력을 거의 잃게되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자연스럽게 제거하여 백성들의 원망도 사지 않게 되고, 조만간 제나라는 그대의 나라가 될 것이오.”
자공의 마지막 말은 전담을 매우 고무시켰다. 결국 전상의 최종 목표는 제나라의 임금이었다.
“선생의 말씀이 백번 옳소. 이제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소. 하지만 지금 제나라의 군대는 이미 노나라의 국경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방향을 돌려 오나라를 치면 많은 대신들이 의혹을 품지 않겠소?”
자공은 전상이 당연히 그렇게 물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대는 결코 군사를 움직이지만 않으면 되오. 제가 바로 오나라에 가서 출병을 요청할 생각이오. 그때가 되면 구실을 붙혀 제나라의 군사를 오나라의 국경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되오.”
전상은 자공의 말에 완전히 설복당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속셈 때문에 자공의 이번 유세에 담긴 비수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조만간 노나라의 주변에 있는 다섯나라가 서로 물고 뜯는 전쟁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다.
전상이 오나라로 떠난 자공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에는 전운만 감돌고 일체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제나라의 군영에는 공격을 하지말고 기다리라는 전상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와 월(越)나라는 오랜 기간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오왕 합려(闔閭;서기전 514-496년)는 패자를 칭한 이후 이웃 나라인 월나라를 쳐서 복속시키려고 하였다.
서기전 496년, 월왕 윤상(允常서기전 510-497년)이 죽고 아들인 구천(句踐;서기전 496-465년)이 즉위하였다. 오왕 합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결코 만만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대는 취리(醉李;지금의 절강성 가흥)에서 대치하였다.
오나라의 군대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왕성하였다. 이때 갑자기 월나라 군대의 진영 앞에 웃통을 벗어던진 건장한 사내 수십여명이 차례대로 나와 갑자기 오나라의 진영을 향해 ‘오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임금을 대신하여 사죄를 드린다’는 소리를 지르고 모두 자결을 하였다.
오나라의 군대는 갑자기 벌어진 이상한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은지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런 틈을 이용하여 월나라의 정예병력은 여러 갈래로 우회하여 일시에 오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오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해 후퇴를 하기 시작하였고, 오왕 합려는 후퇴하면서 칼을 맞아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차(夫差;서기전 495-472년)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을 길렀다. 서기전 494년, 오왕 부차는 오자서(伍子胥)를 대장으로 삼고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월나라의 대부 법리(范리)는 오나라의 공세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고 성을 굳게 지키고 대적하지 않는 고수부전(固守不戰)을 주장하였고, 대부 문종(文種)은 조건없는 강화를 주장하였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아버지인 합려의 원수를 갚기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때문에 결코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전(一戰)을 결심하였다. 두 나라의 군대는 태호(太湖)의 부초(夫椒)에서 맞붙었으나 결과는 월나라의 대패였다.
월왕 구천은 문종을 시켜 강화를 요청하였고, 문종은 오왕 부차가 당연히 강화를 거절할 것으로 판단하고, 대장군 오자서와 사사건건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는 백비(伯비)에게 뇌물을 써서 어떻게든 월왕 구천의 목숨은 살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오자서는 이번 기회에 오나라의 화근이 되는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백비의 건의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를 맺기로 하고, 오자서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월왕 구천을 살려주어 최대한의 모욕을 주기로 결심하였다.
강화가 성립되자, 월왕 구천은 오왕 합려의 묘 곁에 초막을 짓고 삼 년동안 죄를 빌었다. 삼 년동안의 충성으로 어느 정도 오왕 부차의 분노가 누그러지자 월왕 구천은 뇌물을 써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월왕 구천은 귀국후 풀섶에 누워 잠자고 쓸개를 씹으며 치욕을 반드시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대부 문종은 미인계를 써서 서시(西施)라는 여자를 오왕 부차에게 바쳤다. 그녀는 오왕 부차를 유혹하여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게 만들었고, 이로인해 오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진하기 시작하였다.
문종은 또한 양곡을 빌리고 다시 갚는다는 차량환곡(借糧還穀)의 계책으로 오나라의 경제를 흔들었다. 그는 오나라로부터 1만석의 양식을 빌려다가 월나라의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이듬해 가장 수확이 잘된 양식 1만석을 오나라에 돌려 보냈다. 오왕 부차는 낱알이 굵고 빛깔이 좋은 이 볍씨를 오나라의 농부에게 나누어 주고 이듬해에 파종토록 하였다.
그런데 월나라에서 보낸 볍씨는 한톨로 싹을 틔우지 못했다. 당연히 오나라의 농부들은 그 원망을 오왕 부차에게 보냈다. 사실 월나라에서 보낸 볍씨는 뜨거운 물에 삶아서 싹을 틔울 수가 없는 볍씨였다.
이때부터 월나라와 오나라는 공개적으로 대결하는 단계에 돌입하였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끈질긴 출병을 권고받고 월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러한 때에 자공이 오나라에 도착하였다. 자공은 본래부터 오왕 부차를 잘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문으로 그가 월나라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로 군비를 강화하고 병마를 조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공은 오왕 부차에게 간단한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 오나라에 도착해서 보니 길거리에 온통 군기(軍旗)가 펄럭이고,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시 제나라를 치기 위한 준비가 틀림없습니까?”
“아니 자공 선생, 내가 제나라를 치려고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부차는 자공의 엉뚱한 물음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공께서 살아계실 때 일찌기 노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제나라는 그때 오나라의 속국이 되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나라는 결코 속으로는 굴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나라의 백성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의 치욕을 갚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왕 부차는 자공의 말에 그간에 보여준 제나라의 태도를 떠올렸다. 몇 해 동안은 조공을 그런대로 바쳤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공은 커녕 사신조차 보낸적이 없었다. 오왕 부차는 자공의 말에 어느정도 수긍을 하였다.
“지금 제나라의 군대는 문수(汶水)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약한 노나라를 멸망시킨 후 옛 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견해는 앉아서 노나라가 망하는걸 구경하지 말고 제나라를 선제공격 하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나라가 쉽게 노나라를 무너뜨리면 그 기세를 몰아 오나라를 치는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제나라의 주력군이 없는 틈을 타서 그들의 후방을 치면 첫째로는 동맹국인 노나라를 구하여 오나라의 협력국을 하나 얻는 셈이되고, 두번째로는 제나라를 굴복시켜 진정한 중원의 패자를 칭할 수 있게 됩니다.”
“선생의 말은 정말로 이치에 합당한 견해요. 나도 사실은 제나라를 쳐서 선부(先父)께서 이룩한 패자의 위업을 계승하고 싶소. 다만 월나라에서 지난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병마를 조련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후방을 경계하지 않고 제나라를 칠 수가 없는 입장이오. 따라서 나는 남쪽의 일을 먼저 해결한 후에 북쪽의 일을 처리할 생각이오.”
“대왕의 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인의(仁義)를 갖춘 임금은 결코 쇠락한 제후의 사직(社稷)을 끊어지도록 만들지 않는 법입니다. 오히려 패자를 칭하기 위해서는 강적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됩니다. 제나라는 노나라를 치고 그 세력을 키워 오나라와 패자를 놓고 경쟁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왕을 위해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공은 부차가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말을 듣는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게다가 대왕께서 노나라를 구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제나라를 쳐서 굴복시키면 진정한 패자의 자리도 보장받습니다. 이로부터 각국의 제후를 안위하고, 포악한 제나라를 응징하고 거만한 진(晉)나라를 정복한다면 이 또한 한 대의 화살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보다 더한 기회가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오왕 부차는 이미 자공의 유세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월나라의 위협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선생의 견해는 구구절절 옳소. 하지만 월왕 구천은 3년동안 받은 치욕을 갚기위해 군비를 강화하고 병사를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있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월나라를 먼저 굴복시켜야 되겠소.”
자공은 이제야 오왕 부차의 심리를 완전히 파악하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왕은 사안(事案)의 경중(輕重)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판단하는게 가장 급합니다. 월나라가 오나라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제(齊)나라라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오로지 월나라만 생각하고 있기에 제나라의 발전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월나라를 굴복시키고 다시 제나라를 치려고 한다면 아마 그때는 제나라가 노나라를 병합하여 지금보다 훨씬 강성해 있을 겁니다. 그러면 패자가 되려는 대왕의 계획은 전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공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한 대왕께서 제나라를 응징하지 않고 제후국의 멸망을 수수방관한 채 그대로 보고 넘긴면서, 오히려 약소국인 월나라를 공격한다면 세상의 모든 비난은 대왕의 한 몸에 쏟아질 것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영웅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인의(仁義)를 실천하며, 지혜로운 자는 절대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도덕(道德)을 겸비한 왕은 제후의 사직을 끊어지도록 놓아두지 않는 법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해야만 진실로 천하의 백성들로부터 숭앙을 받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강폭한 제나라와 교만한 진(晉)나라를 응징하고, 월나라의 사직과 노나라의 위기를 구한다면 약소한 모든 제후들은 한마음으로 대왕께 굴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패자의 성취입니다. 대왕께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왕 부차는 입술을 굳게 다문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왕께서 만일 월나라의 공격을 걱정하신다면 제가 월왕 구천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겠습니다. 대왕께서 제나라를 응징하러 떠날 때 반드시 응원군을 보내게 한다면, 그때 월나라에는 군사가 없기 때문에 오나라가 공격을 당할 염려는 절대로 없게됩니다.”
부차는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자공의 3번째 유세가 월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월나라로 떠나면서 자공은 끊임없이 머릿계산을 하였다. 월나라에서 해야 할 유세는 결코 제나라와 오나라에서 벌인 유세와는 성격과 방법이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어찌되었던 제나라와 오나라는 모두 대국으로 자존심을 걸고 서로 한판 승부를 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월나라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 만일 오나라가 월나라의 재기를 염려하여 다시 침공한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월나라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또한 지난번처럼 월왕 구천이 인질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는게 아니라, 나라의 멸망과 월왕 구천의 죽음도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월나라의 입장에서는 오왕 부차의 침략을 어떻게든 막아내는 일이 중요하였다.
자공은 우선 오왕 부차의 되돌린 마음을 계속 유지시키면서, 월왕 구천으로 하여금 오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응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연결고리가 만일 하나라도 삐걱한다면 노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월왕 구천은 자공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차라 쉽게 자공의 접견을 받아들였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서 당한 치욕을 갚고자 분투하고 있는 마당이라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자공을 만나 그의 식견을 듣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구천은 자공에게 간단하게 공자의 안부를 묻고, 짐짓 매우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 월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로 여러번에 걸쳐서 치욕을 당하였는데, 어찌하여 귀하신 몸이 이렇게 친히 왕림하시었소?”
“저는 월나라가 또 다시 한번 치욕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왔습니다.”
마음속의 걱정을 간파당한 구천은 그제서야 자세를 고치고 자공에게 정중한 언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어떤 가르침이 있어 오시었소?”
“지금 오나라에서 오는 길입니다. 저는 오왕 부차를 설득하여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치도록 청하였지만, 그는 한동안 생각끝에 저에게 ‘나는 월나라를 굴복시킨 다음에 제나라를 응징할 생각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왕 부차의 말에 의하면 오나라는 제나라와 당장에 전쟁을 일으킬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월나라는 지난번 오나라에 복속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다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후환을 먼저 제거하는게 상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만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남의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면 이는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복수할 생각이 있으면서 남에게 일찍 발견된다면 일을 성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만일 거사를 하기 전에 상대방이 알게 된다면 가장 위험한 처지가 됩니다. 이러한 세가지 상황은 거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왕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구천은 자공의 예리한 분석에 식은 땀을 줄줄 흘렸다. 멀리 노나라에 있는 자공 같은 사람도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는데, 하물며 항상 월나라를 감시하고 있는 오나라는 어떻겠는가. 만일 오왕 부차가 월왕 자신의 복수를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면,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박살날 일이 뻔하였다.
구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공에게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하고 정식으로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 나는 젊었을 때 호승심과 만용만 믿고 오나라와 싸워서 크게 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3년동안 오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갖은 수모를 당하였소. 오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는 망국의 치욕을 이겨내고 복수를 하기 위하여 그동안 뼈를 깎으며 만반의 준비를 하였소.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오왕 부차와 한판 승부를 겨룰 수 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모든게 허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바라건데 선생께서 이 난국을 헤쳐나갈 가르침을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소.”
자공은 월왕 구천이 자신의 의도에 완전히 말려들었다고 판단하였다.
“현재 월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험한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게 아닙니다. 오왕 부차는 성격이 급하고 자만심이 높으며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오나라는 숱한 전쟁으로 병사들과 백성들이 전쟁을 혐오하고 대신들은 각각의 의견으로 나누어
다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백희의 전횡과 각종 토목공사는 오나라의 국력을 크게 쇠진시키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오로지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왕 부차가 제나라를 치러 떠나면 대왕께서는 오나라의 후방을 공격하실 생각입니까? 제가 판단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오나라가 출병하면 대왕께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오왕 부차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 품었던 의혹을 떨쳐 버리고 더욱 기고만장해 할 것입니다. 그때에 대왕께서는 최대한 머리를 숙이고 계속 비굴하게 신하를 자청하며 더욱 오왕 부차를 존경하는 행동을 보이십시오. 만일 오나라가 제나라와 싸워서 진다면 그것은 대왕의 복이며, 만일 오나라가 이긴다해도 곧바로 진(晉)과 싸우게 되었으니 기회는 계속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오나라의 쇠약은 예정된 수순입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자존심을 죽이고 오나라의 국력이 쇠진하는 모습만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대왕께서 지금이 복수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오나라의 후방을 친다면, 오왕 부차는 바로 군사를 되돌려 월나라와 일전을 치룰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월나라에게 치명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월왕 구천은 자공의 말에 완전한 동의를 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끌러 자공에게 선물로 내주고, 아울러 오나라의 국경까지 친히 전송을 하였다.
오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공이 되돌아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오자서는 수차례에 걸쳐서 제나라를 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월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입장이 점점 난처해지는 가운데 마침 자공이 시간에 맞추어 오나라에 돌아왔다.
자공은 월나라에서 자신이 유세한 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왕, 이제는 모든 염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월왕 구천은 대왕께서 월나라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곧바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채 말하기를 ‘나는 능력도 없고 겁이 많은데 선왕의 기대와 압박을 이기지 못해서 오나라와 무모한 전쟁을 벌여 나라는 엉망이 되고 나 또한 갖은 고초를 겪었소. 이는 모두 나의 부덕이며 어리석은 결과였소. 다행히 대은대덕한 오왕을 만나 신속(臣屬)을 약속하고 고향에 돌아와 살게되니 더이상 바랄 나위도 없고 그저 편안하게 한 세상을 살고 싶을 뿐이오. 돌아가거든 이 몸은 결코 오나라에 배은망덕한 짓을 하지 않을 뿐더러, 여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만 전해주시오’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오왕 부차는 그제서야 더욱 안심이 되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소. 이제껏 줄곧 오자서는 월나라를 쳐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소. 다행이 월왕 구천이 나의 고민을 덜어주는구료.”
오왕 부차는 자공의 말을 듣고 제나라를 치겠다는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 자공이 오나라를 떠나려는 때에 월나라에서는 대부 문종을 보내 각종 선물과 국서를 오왕 부차에게 바쳤다.
“신 구천이 대부 문종을 보내 지난 날의 불경했던 죄를 다시 비옵니다. 듣자오니 이번에 대왕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강폭한 제나라를 응징하고 약한 노나라를 구해 인의(仁義)를 천하에 널리 행하신다고 하니 미천한 이 몸은 그저 감읍할 따름이오며, 미약하나마 힘이 되고자 병사 3천명과 화살대를 보내고자 합니다. 먼저 대부 문종의 편에 월나라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여러 무기와 철갑 옷 20벌, 많은 보검과 약간의 과(戈)와 모(矛)를 바치오니 신의 충성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월왕 신 구천 올림.”
오왕 부차는 월나라의 국서와 조공 물품을 받고 모든 의심을 풀었다. 오왕 부차는 바삐 자공을 찾아 그의 의견을 물었다.
“선생, 이번에 월왕 구천이 국서를 보내 자신도 친히 나를 따라 제나라를 치는 전쟁에 나서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자공은 그 말에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십시오. 이번에 월나라는 모든 힘을 기울여 오나라를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월왕 구천까지 따라 나선다면 월나라와 오나라의 백성은 물론이고 여러 제후들도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월나라에서는 3천의 병사와 여러가지 무기를 바쳤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공연히 오해를 살만한 월왕 구천의 동행은 승낙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오왕 부차는 이번에도 자공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곧바로 월왕 구천의 동행을 거절하는 국서를 보내고 오나라의 9군(九郡)에 상주한 병사를 징발하여 제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다.
서기전 489년, 오왕 부차는 드디어 제나라를 치기위한 출병을 하였다. 떠나는 길에 오자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하였다.
“월왕 구천은 와신상담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제나라로 출병하면 그자는 반드시 우리의 후방을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먼저 가까운 우환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먼 곳의 걱정만 생각하니 이는 바보가 아닌 이상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여전히 오자서의 말을 듣지않고 진군을 명령하였다. 오나라와 제나라의 전쟁은 예상대로 오나라의 대승으로 끝맺었다. 애능(艾陵)에서 벌어진 양군의 전투에서 오나라는 제나라의 국서(國書), 공손하(公孫夏)등 제나라의 유력한 귀족가문의 장군 7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부차는 승리를 얻자 더욱 의기양양 해져서 오자서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오자서는 부차의 행동을 보고 오나라가 곧 멸망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포고문를 가지고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자신의 아들을 친구인 제나라의 포식(鮑息)에게 남기면서 성과 이름마저 바꾸게 하였다.
오왕 부차는 후에 밀고자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듣고 오자서에게 칼을 보내 자결토록 명령하였다. 오자서는 자결을 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나의 눈알을 파서 성의 동문에 걸어주게나. 월왕 구천이 쳐들어와 오나라가 망하는 광경을 그 두 눈으로 지켜보겠네.”
오자서가 죽은 후 오나라에는 간언을 하는 충신이 한 명도 없었다. 오왕 부차는 애능전투 후 자신감이 팽배해져 곧바로 진(晉)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오나라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진나라의 방어에 막혀 더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양국의 전투는 대치국면으로 치달았다.
진나라가 오나라의 침입을 예상하고 방어를 준비한 것은 자공의 계책이었다. 자공은 오나라를 떠나면서 마차를 진(晉)으로 돌려 진정공(晉定公;서기전 511-475년)에게 유세를 하였다.
“사전에 준비를 두루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제나라와 오나라는 국운을 건 일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때에 오나라가 이기면 오왕 부차는 계속해서 진나라를 칠 것이고, 만일 오나라가 패하면 월나라가 기회를 틈타 오나라를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입장에서는 누가 이기든 반드시 군비를 증강하는 것은 물론이며 성벽을 수리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고 만일 제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서로 물고 뜯는 혼전이 지속되면 진나라는 그 틈을 타서 중원의 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공은 자공의 견해에 무척 놀란듯 얼른 물었다.
“그럼 이와 같은 국면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크게 준비할 일은 없습니다. 무기를 점검하고 성벽을 수리하고 병사를 훈련시킨 다음에 중요한 길목마다 병사를 배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 뿐입니다.”
진공이 안심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공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오왕 부차는 제나라와 전쟁에서 이기면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와 패자의 지위를 쟁취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진나라는 오나라와 일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점도 마땅히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공이 두 주먹을 불끈쥐며 말했다.
“희(姬)씨 성을 가지고 논한다해도 당연히 내가 장자가 아니겠소? 따라서 패자의 자리는 나의 차지가 되는게 당연한 일이오.”
자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대왕, 그것은 다만 유리한 조건의 하나 일 뿐입니다. 패자의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체는 무력과 위신(威信)입니다. 결코 혈통이 좌우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 명심하십시오.”
이로부터 진공은 자공의 말에 따라 오나라의 침입에 충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오왕 부차는 진나라를 치는데 어떤 공도 이루지 못하였다. 양군의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서기전 482년에 황지(黃池)에서 제후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제후들은 어느 나라의 누구를 패자로 인정해야 하는지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오나라와 진(晉)나라는 서로 패자의 자리를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여 태자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왕 부차는 황급히 오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 황지에 주둔하고 있는 오군(吳軍)을 움직여 제후들을 위협하고 결국에는 패자의 지위만 인정받은 채 황급히 귀국하였다.
오나라는 이때부터 월나라와 수차례에 걸쳐 전투를 치루었지만 계속해서 패전하였다. 오왕 부차는 할 수 없이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하고 많은 배상금을 물었다. 월나라도 단숨에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판단아래 강화를 받아들였다.
수년이 흐른 서기전 473년에 세력이 더욱 막강해진 월나라는 오나라를 향해 총공격을 감행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왕 부차를 죽이지 않고 월나라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용동(甬東)이라는 곳에 유배를 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만심이 남달리 큰 오왕 부차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이로써 오나라와 월나라의 오랜 경쟁관계는 월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자공의 유세는 이처럼 단순하게 노나라의 위기를 구한 것에 그치지않고 제나라, 진나라, 월나라, 오나라에 걸쳐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이때의 사건을 두고 이렇게 썼다.
“자공이 한번 유세를 떠나니, 노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고(魯國存), 제나라는 엉망되고(齊國亂), 오나라는 멸망하고(吳國亡), 진나라는 강성해지고(晉國强), 월나라는 패자되었네(越國覇).”
자공의 일생은 유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재산을 늘리는 일을 게을리지 않았다. 그는 조(曹)나라와 위(衛)나라의 국경지역에서 운수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자공은 70여명의 고명한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유달리 이재(理財)에 밝았다. 어떤 제자는 가난과 굶주림에 일생을 보냈고 어떤 제자는 구걸을 해서 살아간 것과 충분한 비교가 되었다.
자공의 재력은 공자의 유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공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유세할 때 공자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제후들에게 선물과 같은 선심공세를 펼쳐 스승의 유세를 도왔다.
그리고 자공 자신이 제후들과 교류를 가질때는 반드시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호화스런 마차를 타고, 제후들에게 한 수레에 해당하는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다섯나라에 걸친 유세를 통해 천하에 명성을 떨친 자공은 더욱 공자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제나라와 노나라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기전 487년과 484년, 두 해에 걸쳐 제나라는 노나라를 침략하여 많은 땅을 빼앗았다. 이어서 서기전 481년에는 전상(田常)이 제간공(齊簡公;서기전 484-481년)을 시해하고 제나라의 대권을 차지했다.
이때 나이가 이미 고희에 이른 공자는 노애공(魯哀公)에게 제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노애공은 노나라의 3대 귀족세력인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라는 3환(三桓)의 반대에 부딫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서기전 480년, 노나라에서는 자공을 제나라에 보냈다. 이때 전상은 아직 완전하게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전이었다. 따라서 전상은 각지의 제후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빼앗은 노나라의 토지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상이 자공에게 배푼 마지막 호의였을 뿐, 이후에 권력이 안정되자 수차례에 걸쳐서 노나라의 땅을 다시 빼앗았다.
자공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자공을 진정으로 슬프게 만든 사건은 공자의 죽음이었다. 서기전 479년, 고희에 이른 공자는 아끼던 제자의 하나인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몸이 몹시 상하였다. 안회가 일찍 죽고 자로마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더이상 삶의 희망을 잃었다.
자공이 급히 공자에게 달려왔을 때 초췌할 때로 초췌한 공자는 겨우 한마디만 남기고 혼절하였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왜 이리 늦었느냐?”
자공은 공자를 부여안고 오열을 떠트렸지만 공자는 깨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천하에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도덕이 엎어졌도다. 나의 주장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가 없다니......’라는 말만 중얼거리다 7일 후 세상을 떠났다.
자공은 이후로 스승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이때 자공의 나이는 겨우 마흔 하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제자들은 모두 3년상을 치루고 모두 떠나갔지만 자공만은 묘 곁에 초막을 짓고 6년을 보내며 공자가 가르친 치세(治世)의 도리를 생각하며 수양을 거듭 하였다.
6년상을 치룬후 자공의 일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사서의 기록이 없다. 공자의 사상을 세상에 계속 퍼뜨려 나갔는지 아니면 이재의 기술을 살려 장사를 하였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
공자는 일찌기 생존에 있을 때 자공이 제사에 쓰일 양(羊)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자 그를 책망하면서 말했다.
“사야, 너는 양의 경제적인 가치를 중시하지만 나는 양을 제사지내는 예(禮)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로써 유추한다면 공자의 사후에 6년간 시묘를 하고 난 자공은 공자의 예치(禮治)를 유세하기 위해 세상을 주유하지 않았나 여겨질 뿐이다.
(끝)
중국엔 중국 정부가 A자 다섯 개를 붙인 최상급의 여유경구(旅游景區ㆍ관광경승지)가 66개 있다. 66이란 숫자가 주는 어감으로는 많구나 싶지만, 면적 대비로 보면 매우 희귀한 존재다. 중국 대륙은 약 960만㎢로 남한 면적 약 10만㎢의 96배다. 단순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남한의 1.5배 정도 되는 넓은 면적에서 한 군데씩만 고른 셈이니, A5급 경구는 그래도 괜찮은 절경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절강성 온주시의 안탕산(雁蕩山ㆍ얀당샨)도 국가 A5급 여유경구 중 하나다. 66개 A5급 풍경구 중 짧게나마 산행을 동반한 탐승이 이루어지는 곳은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안탕산의 존재는 등산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중국 내의 여러 산 중에는 백두산 이외 황산, 옥룡설산 등이 A5급 풍경구로서 인기를 끌어왔다. 안탕산은 아직 국내 등산인들에겐 생소하지만,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면 중국행의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인천공항에서 항주까지 2시간30분 간 다음 다시 버스로 4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리면 안탕산 기슭이다.
안탕산은 한 마디로 ‘중국의 주왕산’이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과 암질이며 바위 형태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러나 암봉의 규모가 갑절 이상 크고 숫자 또한 월등히 많다. 주왕산에 기암(旗岩)과 급수대와 학소대, 시루봉이 각각 하나씩이지만 안탕산에는 제1,2,3,4,5…의 기암, 급수대, 시루봉이 산지사방에 널렸다. 그 크고 무수한 암봉들이 좌우상하로 중첩해 늘어섰으니 진실로 ‘마음과 눈을 모두 놀라게 할’ 천하절경일 수밖에 없다.
1억3천만 년 전 용암분출로 기암 생성 시작
주왕산과 마찬가지로 안탕산의 기암 탄생은 분화구에서 솟아오른 용암이 ‘휘돌아 흘러가다가 식으며 엉기어 굳은’ 회류응회암(回流凝灰岩)이란 암질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한다.
‘움푹한 지형에 고이며 흐름을 멈춘 용암이 응축해 굳는 동안 체적이 줄어들면, 가뭄 때 마른 논바닥 갈라지듯 주로 수직 방향으로 좁고 긴 균열이 생긴다. 이 틈새로 물이 흘러들며 침식이 이루어져 길고 높은 기둥 모양의 암봉이나 가파른 절벽이 생겨났다. 이러한 폭발과 응축 과정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겹치며 반복되어 여러 층의 절경 기암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만 형성 연대가 안탕산이 약 1억3천만 년 전, 주왕산의 약 7천만 년 전으로 다를 뿐이다.’
지질학자들의 말을 대략 요약하면 이와 같다. 그런데 산이름은 왜 안탕산일까. 주왕산은 주왕(周王)의 전설에서 이름이 왔다. 안탕산은 산중의 호수에 기러기(雁)가 날고 갈대가 흔들리는(蕩)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안탕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아차! 잘못 왔다’ 싶었다. 안탕산 기슭 조양산장에 도착, 냉방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단숨에 몸을 휘감았다. 목욕탕 사우나에 들어서는 순간의 느낌, 현상 그대로다. 카메라 렌즈조차 뿌연 수증기로 가려졌다.
여기는 위도가 28도 지역으로, 서울보다 10도쯤 적도에 가깝다. 그러니 한낮 기온이 40℃까지 올라간다. 민가가 전통적으로 모두 2층 이상인 이유도, 1층은 너무 더워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데를 혜초여행사 박장순 이사의 경치 좋다는 꾐에 빠져 그저 생각 없이 따라 나선 게 실수였다.
“어이, 박 이사. 책임집시다!”
그러나 중키에 80kg이 넘는 과체중이라 가만히 서서도 땀을 줄줄 흘리는 불쌍한 박 이사가 무얼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먼 길 달려 왔는데 그냥 호텔 방에만 앉았다가 갈 수는 없는 일이라, 결국 배낭을 메고 ‘안탕 사우나’ 속으로 나섰다.
역시, 중국인 등산객은 전혀 없었다. 우리 일행처럼 배낭 메고 등산화를 신은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고, 거의가 손에 생수통만 달랑 들거나 아니면 부채에 양산을 받쳐든 사람들이 모두다. 아예 웃통을 벗어버린 사내들도 여럿이다. 안탕삼절의 하나인 대용추폭포의 절정을 보려면 7월 장마철이 제철이라지만, 공짜 여행에 웃돈을 얹어준다고 해도 여름 안탕산은 피하길 권한다.
영암, 영봉, 삼절폭 경구에 기암들 특히 밀집
이 경구에서는 대용추폭포보다는 오가는 길에 푯대처럼 꼿꼿이 선 전도봉이 제일 볼거리였다. 전도봉은 높이가 70~80m는 되어 보이는 원추형 긴 암봉으로, 가운데가 길게 쪼개어진 전지가위 형상이다. 그래서 전도봉(剪刀峰)이지만, 가다가 옆에서 보면 악어봉이며, 숲속에 들어 뒤돌아보면 피사의 사탑 같았다가, 혹은 해풍을 잔뜩 머금은 범선의 돛 같아서 일범봉(一帆峰)이다. 보는 방향마다 그렇게 형상이 다르고, 그런 지점마다 다른 이름을 붙이고 화살표식을 한 팻말을 세워두었다. 이곳 안탕산의 기암봉들은 이렇게 방향에 따라 달리 붙인 여러 개의 이름을 가졌다.
왕복 2km도 채 안되는 짤막한 거리의 대용추경구 탐승만으로 모두들 더위에 혀가 늘어졌다. 그러나 심한 더위를 먹고 건망증들이 생긴 것일까. 점심 후 시원한 호텔 방안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나서는 금방 아까의 그 혹독한 더위를 깡그리 잊은 듯,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17명 일행 모두 밖으로 나선다.
오후 탐승 대상은 영봉경구의 핵심지. 개설한 지 3년도 안된 루트를 따라 영봉지구 전체가 조망되는 암봉까지 오를 것이라 한다. 또아리 모양의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곧 조양동이라 이름붙인 바위협곡지대로 접어들었다. “여기도 절벽 위에서 물줄기가 흘러야 제격인데…” 하며 현지 가이드 아가씨는 아쉬워한다. 탐승로 중간 여기저기엔 사방의 기암봉을 구경하며 오르라는 뜻에서 화살표로 방향 표식을 해둔 ‘옥인봉(玉印峰)’, ‘금구봉(金龜峰)’ 등의 팻말이 서 있다.
사람들이 늘 다니는 등산로 돌계단에도 퍼런 이끼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여기는 연중 습도가 대단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땀으로 젖은 손수건을 쥐어짜며 이윽고 오른 산릉. “후와, 바람이다!” 바다로부터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다들 환호하며 웃통을 벗어젖혔다. 저 멀리 바다가 손바닥만하게나마 뵈지만, 흙탕물 색이다. 여기 바다 빛은 늘 저렇다고 한다.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오른 해발 320m쯤 되는 암릉 조망대에서 문득 우리는 황홀경을 맞았다. 서편으로 설핏 기운 태양의 황금빛 햇살을 뒤로 받은 거대 기암들이 서로 다른 윤곽선과 농담으로 초대형 장막처럼 겹치며 계곡은 웅혼한 입체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진실로 그 독한 더위도 잊고, 우리는 암릉을 오가며 영봉경구의 절경에 몰입했다.
매미소리마저 메아리 지는 좁고 깊은 협곡
두 암봉 사이의 안부로 하여 천문협곡으로 내려섰다. 매미 소리마저 울림을 가질 만큼 좁고 깊은 바위협곡이다. 검은 그늘이 진 협곡 저 앞으로는 두 손바닥으로 척 밀어붙여 세워둔 듯한, 붉은 색의 장수대 하늘벽 같은 대암벽을 가진 암봉 초운봉(超云峰)과 천관봉(天冠峰)이 양쪽으로 하나씩 섰다. 그 암봉들이 뿌리내린 명옥계(鳴玉溪) 계곡 바닥에 내려서자 순식간에 땀이 잦아드는 서늘한 골바람이 나무 이파리들을 일제히 뒤집으며 불어왔다. 이 골바람 덕에 그래도 여기는 여름을 날만 하겠다 싶다.
얼른 호텔로 가자며 영봉경구 매표소 밖까지 나서더니, 땀이 좀 식자 모두들 딴 마음을 냈다. 저 계곡 위로 뵈는 석양빛이 괜찮으니 중간 전망대까지만 갔다가 내려오자는 것이다. 더위를 먹은 것인가, 아니면 아까 본 경치에 그만 취해버린 것인가.
중국의 공원 입장료는 좀 비싸다. 이곳 영봉경구만 해도 30위안(한화 3,700원)이며, 야간에는 같은 액수로 따로 받는다. 이곳 영봉경구는 야경으로 유명하다. 폭죽이나 휘황한 조명으로 연출되는 야경이 아니라 이 경구의 숱한 기암들이 야간에 드러내는 실루엣 풍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마를 맞대거나 어깨를 부비며, 혹은 나홀로 우뚝 선 거대 기암봉과 대장벽들에 황금빛 저녁 햇살이 빗살무늬로 내리비추는 명옥계 계곡은 장엄미로 가득했다. 대암봉이나 암벽 하단부의 설동(雪洞), 관음동(觀音洞), 북두동(北斗洞) 등 동굴 안에는 여러 층의 사찰들이 들어앉아 명옥계의 풍경을 더욱 기이한 것으로 떠올리고 있다. 울 명(鳴) 자를 쓴 계곡 이름 명옥계는 소리가 없어도 이미 웅혼한 울림이 느껴지는 이 계곡의 웅장미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합장봉, 노파봉, 쌍죽순봉, 투계봉 등, 밤중이 아니어도 이미 이름이 참으로 절묘하다 싶은, 이따가 영봉야경을 연출할 기암봉들을 바라보며 15분쯤 걸어 올라가 작은 절벽 위의 정자각에 올랐다. 남동쪽 저 위 투계봉 너머, 우리가 아까 올랐던 해발 320m 지점의 암릉부터 그 아래 거대한 바위병풍과 기암봉, 대동굴들이 한눈에 조망되는 자리다. 서편 계곡 상류쪽은 기암봉과 햇살 무리의 조화로 또한 아름다웠다.
솔바람도 부는 이곳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 진실로 더위를 무릅쓰기를 잘했다면서 우리는 사위가 어둑신해질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고, 기다리다 못해 올라온 가이드의 재촉에야 비로소 발길을 옮겼다.
저녁식사 후 되올라와 안탕삼절 중 하나라는 영봉야경을 보았다. 아까 낮에는 합장한 모습이던 합장봉이 가이드가 안내하여 세워주는 자리에 따라 포옹한 남녀의 모습인 연인봉, 혹은 막 나래를 접은 독수리봉이 되었다가 어느 지점에선가는 고개를 젖혀 바라보자 얼굴 위로 바투 다가드는 듯 사람을 놀라게 하는 두 개의 커다란 젖무덤 모양인 쌍유봉(雙乳峰)이 되었다. 물소봉, 목동봉, 노파봉 등 수십 개의 영봉 야경은 모두 그렇게 상상을 동원해 만든 실루엣 풍경들이다.
안 보자니 아쉽고, 보자니 너무 더운 낮을 피해, 둘쨋날은 새벽부터 산행키로 꾀를 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늘하기까지는 않았으나, 견딜만했다.
깊은 산중에 웬 엘리베이터?
가이드가 먼저 삼절폭 경구부터 가자고 해서 다소 실망했다. 물줄기 없는 폭포를 무슨 재미로 볼까. 원통형의 거대한 동굴을 3분의 1쯤만 잘라내고 곧추 세워놓은 듯한 폭포굴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낮은 속삭임에도 예민하게 반향한다. 하절폭에서 중절폭에 이어 상절폭으로, 우리는 형성 연대에 따라 여러 층의 커다란 단을 이룬 안탕산의 절벽을 이리저리 더듬듯 하며 거슬러 올랐다. 어제의 영암경구에 비하면 다소 단순한 듯한 붉고 검은 절벽 풍경이 조망점마다 반복되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를 무렵 계곡 저 아래에서 유장한 분위기의 음악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요란한 폭죽소리가 또한 길게 이어졌다. 사람이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을 때 저렇게 폭죽으로 축복한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어제와 비슷한 해발 300m 정도까지 올랐다가 우리네 것과 똑같은 더덕 내음이 풍기기도 하는 산중턱 가로지름길을 따라 우리는 정명곡(淨名谷) 계곡 상류로 향했다. 푸르스름한 이내로 덮인 좁고 긴 이 계곡에서 단연 으뜸인 경관은 다듬이 방망이와 흡사한 모양으로 곧게 선 일품봉(一品峰)이었다. 계곡 바닥으로 내려섰다가 맞은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저 멀리 귀두까지 확연한 남근석이 보이긴 했지만, 이틀새 워낙 이런 형상의 바위를 많이 보아 별 감흥이 없다.
급비탈의 암벽이어서 혹 바위라도 굴러내리면 피할 재간이 없겠다 싶은 협곡 가운데 휴게소 지나 삼절폭경구 매표소를 빠져나왔다. 오전 8시. 관리소 아가씨가 매표소 주변을 긴 빗자루로 쓸고 있다.
약 2시간30분, 6.5km에 걸친 삼절폭 경구의 오전산행은 그런대로 견딜 만 했지만 조식 후 마지막 남은 영암경구쪽 길은 어떨까.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서 주욱 가로질러 가면 되는 관광 코스라는 말에 모두들 혹 해서 나섰는데 아뿔싸, 케이블카가 고장이란다. 다행히 소형 버스로도 종점까지 오를 수 있다기에 가슴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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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4 06:00 입력 / 2008.01.04 07:10 수정 |